호리구치 구마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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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리구치 구마이치는 1865년 에치고 나가오카 번에서 태어나, 도쿄 제국 대학 법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1894년 일본 최초의 외교관 및 영사관 시험에 합격하여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인천 영사관보로 근무 중 을미사변에 연루되었고, 멕시코에서 군사 쿠데타 당시 대통령 가족을 보호했다. 또한, 아르헨티나 군함 구매 협상을 성사시켜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에 기여했다. 루마니아를 마지막으로 외교관에서 은퇴한 후 저술 활동을 했으며, 태평양 전쟁 중에는 일본군의 전의를 고취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1945년 10월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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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리구치 구마이치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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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호리구치 구마이치 |
원어 이름 | 堀口九萬一 |
로마자 표기 | Horiguchi Kumaichi |
출생 | 1865년 12월 28일 |
사망 | 1945년 3월 13일 (79세) |
직업 | 사업가 |
배우자 | 호리구치 야스에 |
자녀 | 호리구치 다이가쿠, 호리구치 유키코, 호리구치 시즈에 |
친척 | 호리구치 고레토모 (형) 야마구치 다케시 (손자) |
관련 정보 | |
관련 인물 | 호리구치 다이가쿠 호리구치 고레토모 |
2. 생애
호리구치 구마이치는 1894년 외교관 시험에 합격하여 1925년까지 네덜란드, 벨기에, 스웨덴, 스페인, 브라질, 루마니아 등지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1895년 을미사변에 연루되어 정직 처분을 받았으나 복직했고, 1895년 첫 부인과 사별 후 벨기에 여성과 재혼했다. 차남은 스웨덴 근무 중 태어났다.[2]
외교관 은퇴 후에는 강연 및 저술 활동을 했으며, 태평양 전쟁 중에는 일본군의 사기를 높이는 글을 썼다. 1945년 패전 직후 80세로 사망했다.[23]
만년에는 구 나가오카 번 출신 학생 지원 재단법인 나가오카 사 이사[24], 국수주의 단체 삼육구락부(미즈호 구락부) 및 명륜회 이사, 시국 협의회 간사 등을 맡았다.[25] 1937년 남천초 탄광 주식회사 취체역[26]을 역임했고, 1935년 국제 문화 진흥회 문화 사절로 중남미를 방문했다.[27]
2. 1. 초기 생애
1865년 에치고국 나가오카 번에서 아시가루의 아들로 태어났다. 3세 때 보신 전쟁으로 아버지가 전사했고, 나가오카 번이 역적으로 몰리면서 어려운 유년 시절을 보냈다.[2] 어머니 밑에서 자란 그는 18세에 나가오카의 한 학교 교장을 맡았고, 이후 도쿄 제국 대학 법학부에 수석 입학했다.[8] 재학 중 결혼하여 1892년 장남 다이가쿠를 낳았다.[5]2. 2. 외교관 경력
1894년 일본에서 처음 시행된 외교관 및 영사관 시험에 합격했다.[9] 같은 달 말, 외무성 영사관보로서 조선 인천에 부임했다. 1895년 3월 한성 재임이 되었으나, 10월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관여한 혐의로 미우라 고로 공사, 스기무라 준 1등 서기관 등과 함께 귀국 및 정직 처분을 받고 용의자 중 한 명으로 예심 심문을 받았다. 1896년 1월 예심 결과 증거 불충분으로 전원 면소 처리되어,[10] 2월에 복직했다. 청 사시 근무를 거쳐, 9월에는 외교관보(고등관 7등)로서 네덜란드 부임을 명받았다.[9]이후 부임지와 관력은 다음과 같다.
기간 | 직책 | 비고 |
---|---|---|
1896–1899년 | 네덜란드 (헤이그) 재임[11] | 1897년 11월 공사관 3등 서기관, 고등관 6등 |
1899–1905년 | 브라질 (페트로폴리스) 재임[12] | 1901년 3월 공사관 2등 서기관, 고등관 5등. 1902년 후반부터 임시대리 공사 |
1906–1908년 | 스웨덴 (스톡홀름) 재임[13] | 11월 고등관 4등, 1908년 12월 공사관 1등 서기관 |
1909–1913년 | 멕시코 (멕시코시티) 재임[14] | 1910년 12월 고등관 3등, 아라카와 미지 공사 면직 이후 임시대리 공사 |
1913–1918년 | 스페인 (마드리드) 재임[15] | 1914년 후반부터 임시대리 공사 |
1918–1923년 | 브라질 (페트로폴리스) 주차[16] | 1918년 7월 특명 전권 공사, 고등관 2등. 1923년 6월 고등관 1등 |
1923–1925년 |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주차[17], 세르브-크로아트-슬로베니아 왕국 주차 겸임[18] |
1898년 앤트워프에서 개최된 '방면 죄수 및 기아 보호에 관한 만국 회의'에 내무 서기관 아리마츠 히데요시와 함께 위원으로 참석했다.[19] 1908년 베를린에서 개최된 '만국 저작권 보호 동맹 회의'에 내무성 참사관 미즈노 렌타로와 함께 전권 위원으로 임명되어, 문학적 및 미술적 저작물의 보호에 관한 수정 베른 조약에 서명했다.[20][21] 1914년 마드리드에서 열린 제7회 만국 우편 회의에 체신성 관료와 함께 참석했다.[22]
1925년 3월 말, 의원 면관되어 외교관에서 물러났다.
러일 전쟁 직전인 1903년 12월, 브라질 주재 당시 고무라 주타로 외무대신으로부터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건조 중이던 아르헨티나 군함 2척(모레노 및 리바다비아) 구매 협상 임무를 부여받았다. 호리구치는 크리스마스 당일 아르헨티나 외무 장관과 면회하여 내락을 얻고, 다음 날 해군 장관 및 대통령과 회견하여 임무를 완수했다. 이후 양 군함은 1904년 2월 요코스카까지 회항했으며, "닛신"과 "카스가"로 개명되어 동해 해전에 참전했다. 군함 매매 대금은 약 1500만엔이었으며, 관련 정보는 영일 동맹에 따라 영국 정부로부터 제공받았다.[28][29]
2. 3. 만년
1927년 네덜란드의 작가 엘렌 포레스트가 쓴, 일본을 무대로 한 소설 《유키 씨》 (雪さん|유키 씨일본어)를 《조세이》(女性)지에 번역 연재했다.[23] 태평양 전쟁 중에는 《앵글로색슨의 잔인성》, 《이번에 미국은 진다》 등 일본군의 전의를 고양하려는 내용의 글을 썼다.[23] 1945년 10월 숨졌다.3. 을미사변 가담
1894년 9월 제1회 외교관 및 영사관 시험에 합격하여 외무성 영사관보로서 인천에 부임했으며, 1895년 을미사변에 가담했다.[9] 1895년 3월 한성으로 옮겼으나, 같은 해 10월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연루되어 미우라 고로 공사, 스기무라 준 일등 서기관 등과 함께 일본으로 송환되어 조사를 받았다.[9] 1896년 1월 예심 결과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다.[10]
2021년 11월, 호리구치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 8통이 발견되었다. 1895년 10월 9일자 편지에는 자신이 왕궁에 침입하여 왕비를 살해했다고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침입은 나의 담당이었다. 담을 넘어 (중략) 겨우 안쪽 어전에 도착하여 왕비를 시해했소", "의외로 용이하여 오히려 허무했소"라고 적혀 있었다.[33]
대한민국 입장에서는 을미사변은 주권 침해이자, 명성황후 시해라는 끔찍한 범죄이기에 호리구치 구마이치는 용서할 수 없는 전범으로 간주된다.
4. 멕시코 혁명 시기 활동
1913년 2월 9일, 멕시코 수도에서 비극의 10일이라 불리는 군사 쿠데타가 발생했을 때, 호리구치 구마이치는 멕시코 주재 임시대리공사였다.[30][43] 마데로 대통령 군과 반란군 간의 무력 충돌이 벌어진 첫날, 마데로 대통령의 부인 사라 페레스와 대통령의 가족, 하인 등 20여 명이 일본 공사관으로 피신하여 보호를 요청했다. 호리구치는 이들을 모두 공사관으로 맞아들여 보호했다.[30][43]
2월 18일, 마데로 대통령은 우에르타 장군에게 체포되어 사임을 강요받았지만 거부했다. 2월 20일 밤, 우에르타 장군은 임시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 전에 일본 공사관을 포격하여 대통령 가족에게 해를 가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호리구치는 대통령 관저로 우에르타 장군을 직접 찾아가 사실 여부를 따져 물었다. 우에르타 장군은 이는 허위 정보이며 공사관 경호도 약속하겠다고 답했다. 호리구치는 "궁지에 몰린 새는 품으로 돌아온다"는 속담을 인용하며, 일본은 구원을 바라는 자를 보호하는 국풍을 가지고 있으며, 대통령 가족뿐 아니라 위급한 상황에 처한 멕시코인이라면 누구든 차별 없이 보호하겠다고 밝혔다.[30]
2월 21일, 각국 대사들과의 접견식에서 우에르타 임시 대통령은 호리구치에게 "일본인의 의협심과 배려심이 깊다는 것은 늘 들어왔지만, 이번 일본 공사의 행동으로 저는 그것을 눈앞에서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마데로 대통령 가족 20여 명의 생명을 구한 것은 호리구치의 용감한 보호 덕분이라며, 멕시코 대통령으로서뿐만 아니라 멕시코 국민 전체의 이름으로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고 밝혔다. 현지 신문도 호리구치의 행동을 "일본인에게 고유한 높은 도덕의 발현"이라고 칭찬했다. 그러나 2월 22일 밤, 마데로 전 대통령은 살해되었다.[30] 혁명의 퍼스트레이디라고도 불린 사라 페레스〈영어판〉는 이후 쿠바와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가 1921년에 멕시코시티로 돌아와 1952년에 사망했다.
2015년 2월 26일, 멕시코 연방 상원 의회는 본회의에서 마데로 대통령 일족에 대한 일본 공사관의 보호와 관련하여 일본 국민에게 감사하는 결의를 채택했다. 같은 해 4월에는 "1913년 2월의 고난의 날들에서 그 모범적인 삶과 마데로 대통령 가족에 대한 보호에 관하여, 호리구치 구마이치와 위대한 일본 국민에게 바칩니다"라고 새겨진 기념 플레이트 제막식이 열렸다.[31] 7월에는 주일본 멕시코 대사관에서 "사무라이 외교관" 호리구치 구마이치를 칭송하는 식전이 열렸다.[32]
5. 아르헨티나 군함 구매 협상
1903년 러일 전쟁 직전, 브라질 주재 공사였던 호리구치는 고무라 주타로 외무대신으로부터 긴급 지시를 받았다.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건조 중이던 아르헨티나 군함 2척(모레노와 리바다비아)이 매물로 나왔는데, 러시아가 구매 협상 중이었으나 대금 지불 방식 문제로 지연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일본은 계약 당일 전액 지불 조건으로 협상에 나섰다.[28][29]
호리구치는 즉시 아르헨티나로 건너가 외무 장관과 만나 구매 의사를 전달했고, 다음 날 해군 장관 및 대통령과 담판을 지어 계약을 성사시켰다. 이 군함들은 내부 공사가 완료되지 않은 상태로 1904년 2월 요코스카에 도착, 각각 "닛신"과 "카스가"로 이름이 바뀌어 동해 해전에 참전했다. 군함 구매 대금은 약 1500만엔이었으며, 영일 동맹에 따라 영국 정부로부터 관련 정보를 제공받았다.[28]
이 군함 구매 뒷이야기는 1940년 일본방송협회(도쿄중앙방송국) 라디오 방송에서 호리구치 본인이 직접 밝힌 바 있다.[28]
6. 저서
- 《유심록》, 다이이치 쇼보, 1930년
- 《남미 및 스페인》 (南米及び西班牙|남미 및 서반아일본어), 헤이본샤, 1933년
- 《외교와 문예》, 다이이치 쇼보, 1934년
- 《세계와 외교》, 다이이치 쇼보, 1936년
- 《세계와 세계인》, 다이이치 쇼보, 1936년
- 《세계의 기억》 (世界の思ひ出|세계의 추억일본어), 다이이치 쇼보, 1942년
- 《장성시초 호리구치 다이가쿠 번역본》, 다이몬 출판, 1975년
7. 가족 관계
1895년 첫 부인과 사별한 후, 벨기에 여성(호리구치 스티나)과 재혼했다.[34] 장남 호리구치 다이가쿠는 시인이자 번역가이다. 차남 호리구치 요시노리는 스웨덴에서 태어나 "서전(瑞典)"[34]이라 이름 지어졌다. 호리구치 즈이텐은 도메이 통신사 및 산케이 신문 기자를 거쳐 일본IBM 이사 홍보부장을 역임했다.
참조
[1]
문서
明治以前の[[改元]]は、当該年の元日に遡って元年とみなされたため、公式上は慶応元年生まれとされる。
[2]
서적
訂正戊辰北越戦争記
目黒十郎支店
[3]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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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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旧李王家東京邸内の武石弘三郎作大理石浮彫について [Takeishi Kôzaburô's marble relief in the former residence of Lee Eun in Tok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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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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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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